회고가 가진 힘의 첫 경험

1.글쓰는 걸 업으로 삼아온 시간 중 절반을 매체에서 기자와 에디터로 있었다. 그때는 매주 2,000자에서 3,000자 사이의 글 여러 편과 매월 A4 기준 10장~20장 분량의 글 한 편을 쓰는 일이 주 업무였다. 이처럼 할당량을 채우다 보면, 지난날 내가 썼던 글의 내용이나 글을 썼던 방식 혹은 글의 형식 등 여러 면을 회고할 여력이 없었다. 끊임없이 몇 자라도 써내는 일과 사투를 벌어야만 했다.


2.그러다가 카카오브레인이라는 회사에서 글을 쓰면서부터 회고가 가진 강력한 힘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당시 내가 재직하던 시절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회사 내부 행사인 미니 컨퍼런스를 끝내고 나서, 모두가 둘러앉아 그날 행사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개발/연구팀은 행사 일정에 맞춰서 프로젝트 진척 현황을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방향성을 재검토하기도 했다.


3.회고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프로젝트 단위로 협업을 해야만 했던 많은 사람에게 회고는 너무나 당연하고 의례적인 행사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산출물을 내기 위해 최소 수개월 많게는 수년간 여러 사람과 긴밀히 협업해본 경험이 없는 내게 이 회고의 장은 진귀한 광경 그 자체였다. 주 단위로 각자가 쓰려는 콘텐츠 아이템을 공유하고, 구체적인 방향은 데스크하고만 논의했던 지난날의 편집 회의를 회고라고 볼 수 없을 터다. 말 그대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을 공유하는 수준에 불과해서다.


4.페이스북 담벼락에 또는 회사 커뮤니케이션 채널에 새로운 정보 또는 생각을 적다 보면, 하루에 몇천 자쯤은 숨 쉬듯이 쓰게 된다. 여기에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계속 무엇인가를 쓰고 또 고쳐 쓴다. 이처럼 완벽하게 주어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여전히 어렵다. 특정 주제로 남에게 보여주기를 목적으로 하는 글을 정해진 기한 내로 써내야 하면 더욱더 그렇다. 독촉하면 할수록 심적 압박감에 시달리다 못해 온몸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5.이 심리 상태를 잘 알기에, 일터에서는 공동 작업자인 엔지니어에게 따로 마감일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일로 만난 사이’라서 상대가 내 업무 요청을 무시한 경우는 없었다. 상대도 기한을 명시하지 않은 채 ‘곧 회신해서 주겠다’라고 답한다. 이로 인해 예측치를 벗어난 시점에 회신이 오는 일이 잦아 업무 예측성을 높이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작업한 글 : torchgpipe가 탄생하기까지


6.그러다가 카카오브레인 재직한 지 약 1년 반이 지나서, torchgpipe’라는 글을 쓸 때였다. 그런데 당시 작업을 같이했던 엔지니어는 되려 본인이 마감일(회신 가능한 날짜)을 먼저 알려줬다. 혹시라도 그 날짜 내로 회신하지 못하면 미리 일정 조율에 관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상대에게 부담을 줄까 지레짐작해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때와는 다르게, 개발 일정으로 목표한 날에 회신을 주지 못할 때나, 혹은 답변지를 소화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을 때 모두 오히려 서로 편히 일정을 쉽게 조율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업무 예측성도 동반 상승한 효과도 발생했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데 카카오브레인 동료인 이흥섭 (Heungsub Hans Lee) 연구원으로부터 슬랙 메시지가 왔어요. "오늘 회사 사람들과 외부 수퍼개발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카카오브레인 블로그에서...

게시: 이수경 2020년 2월 7일 금요일


7.그 뒤, 몇 달씩 같이 작업을 진행했던 이 엔지니어에게 ‘일정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점이 가장 좋았다’는 내용의 메시지로 보냈다. 글의 첫 자와 끝 자에 대한 상세 피드백도 감사하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상대는 글 작업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화답을 보내왔다. 단순히 서로의 좋았던 점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동 글 작업 프로세스 중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는지,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에 대해서도 피드백을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프로젝트 하나를 끝맺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피드백 내용을 반영한 개선된 프로세스로 다음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새로이 다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8.그 결과, 현재는 이런 회고 미팅도 글 작업 프로세스 중 한 단계로 편성했다. 한편, 프로젝트 시작에 앞서서는 이번 작업에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결과물의 목표와 각자의 역할, 그리고 일을 진행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킥오프 미팅’을 연다. 그리고 프로젝트 중간에는 ‘중간 미팅’을 통해 결과물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 그리고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문제는 없는지도 점검한다. 서로 생각하는 게 같은 데 이를 표현하는 방식 차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혹은 나와 남이 해야 하는 역할과 책임이 모호해서 오는 분쟁도 왕왕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점검하는 목적의 미팅과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9.현재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서는 특히 엔지니어와 개발자와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방식으로 컴을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인 거 같다. 물론 엔지니어와 개발자가 이미 훌륭한 연구 및 개발 성과를 낸 게 좋은 콘텐츠의 근간이겠지만, 그들의 협조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커뮤니케이션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Feature Image from Pixabay



Samantha
Samantha 7년차 글쟁이. 경제지와 뉴미디어에서 기자로 일하다, 현재 IT 기업에서 인공지능 콘텐츠를 쓰고 있다. 취미로 생산성 앱을 활용한 글쓰기 프로세스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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