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간다

0.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배라면, 이해 관계자가 사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쓸 때도 사공이 적을수록 글다운 글을 완성할 가능성이 커진다. 도서 ‘스타일과 목적을 살리는 웹글쓰기(저 니콜 펜튼, 카이트 키퍼 리, 역 김희정)’에서도 다음처럼 썼다. 그렇지 않으면 탁상공론만 펼치다 제대로 된 방향의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본인도 글을 쓸 때 여러 명이 피드백을 주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연구원 개발자에게 “내부 R/D 팀에서 의견을 하나서 모아서 피드백을 달라”고 요청한다.

일반적으로는 소수 인원의 의견을 모아 초안을 마무리 짓는 편이 한결 쉽다. 대기업에서는 혼자 일을 하거나 클라이언트만 상대할 때보다 더 많은 인원으로부터 초안에 대한 리뷰를 받게 될 수 있다. 이럴 때는 몇 사람만 편집자나 최종 승인자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최종 결정권이 없는 리뷰어로만 참여시키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1.실제로 이를 경험해보니 여러 사람이 글에 참견하게 되면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한 글에서 회사에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는데, 오늘은 5년 전 당시 있었던 일을 좀 더 자세히 적어보고자 한다. 몇 해 전 매체에서 일했을 때다. “산업부에서 빅데이터를 주제로 기획 기사를 쓰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있었다”며 기획서를 만들어서 내라고 했다.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이 IT 분야와 연관성이 커서 관련 산업과 기업을 출입하는 내가 적임자라 생각했던 듯하다.


2.잠시 매체에서 기획 기사를 쓰는 방법을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모든 매체가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는 않을 거다. 필자가 있었던 매체를 기준으로 소개해보겠다.

(1)’기획안’은 짧은 시간에 진행한 사례 리서치를 토대로 만든 주제와 매우 간단한 목차로 구성된 내용을 담는다. 상부에 ‘컨펌’을 받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계획서’를 써서 기사의 취재 방향과 취재 대상을 구체화한다.

(2)계획서를 컨펌을 받고 난 뒤, 취재 대상자(기업, 사람)자 선정과 섭외 등의 작업을 진행한다. 완료된 뒤 모든 내용을 다시 정리해 좀 더 구체적인 계획서를 다시 보고한다.

(3)서면 및 자료 취재를 모두 완료하고 나서는 개요를 쓴다.

(4)컨펌을 받은 개요를 토대로 초안을 써서 넘기면, 몇 번의 피드백을 주고받은 끝에 드디어 기획 기사 하나를 낸다.


3.에디터 및 취재 기자로 일했던 2015년과 2016년의 시대적 배경은 이렇다.

(1)당시에는 빅데이터를 키워드로 내세운 각종 마케팅 캠페인이 범람했다. 특히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동안 대한민국에는 P2P 투자 플랫폼 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상황이었다. 각 플랫폼 기업은 신용 평가 모델의 정교화를 위해 사용자로부터 얻은 데이터를 활용한다는 메시지를 널리 알렸다. 이 열풍에 발맞춰서 기존 신용카드사와 은행에서도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맞춤형 상품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선보였다.

(2)O2O(offline to online)를 너도나도 비즈니스로 내세우기도 했던 이 당시에는 POS기 결제 정보를 활용하려는 목적(실제로 얼마나 많은 메뉴가 잘 나가고 있는지, 한 사람당 평균 얼마의 금액을 쓰는지 등)에서 MOU나 지분 투자도 활발했다. 앱에서 매장 메뉴를 바로 주문하는 기능을 연동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이 마케팅 키워드는 오늘날의 인공지능으로 대체됐다.

(3)마침 또 그 당시 국내 대표 IT 기업인 카카오에서 2015년에 데이터 과학자로 구성된 스타트업 ‘넘버웍스’를 인수하는 등 데이터 과학자를 향한 ‘전에 없던 기업의 관심’도 크게 쏠리던 해였다. 카카오톡 채팅 내용을 분석해 연애 감정을 가진 두 사람의 속마음을 분석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캐터랩도 15억 원 규모의 초기 투자를 받는 등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을 가진 개인과 기업에 대한 가치를 점차 더 높게 치려는 움직임도 또렷하게 보였다.


4.나는 3에서 언급한 내용을 바탕으로 ‘빅데이터의 시대, 전문가로 성장하기’라는 주제로 “빅데이터를 잘 분석하는 기술력을 갖추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첫 번째 기획안을 제출했다. 데이터 분석 업무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역량과 지식, 커리어 로드맵에 관해 알아보는 내용이 골자였다. 피드백을 기다리던 8월의 마지막 월요일이었다. 부장이 “여러 산업의 전문가 3명을 선정하고 6페이지 분량의 글로 구체적인 취재 계획서를 써오라고 지시했다. 그다음 날에는 주요 기업의 공시 처리와 틈틈이 전화 취재해가며 내일 쓸 기사를 준비하던 정신없는 와중에도 첫 번째 기획안을 좀 더 다듬어서 냈다.


5.9월 첫째 주 어느 날, 부장이 빅데이터 관련 회의가 열렸다며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금융부와 유통부, 국제부, 그리고 산업부 모두가 소환된 자리에서 빅데이터 기사와 관련된 방향성을 다시금 논의하는 자리였다. 기획안을 써내라고 하기 전에 이런 자리가 먼저 열렸다면 참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지난 첫 번째 기획안을 한 번 더 고쳐 쓰던 지난날의 삽질이 떠올랐으나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각 부서가 담당하는 영역에서 빅데이터 관련 기업의 현황을 리서치해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1)인공지능을 훈련할 때 필요한 데이터의 가공, 2)매장에 들어오는 고객의 움직임을 기록한 데이터를 분석하려는 시도, 3)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 사례, 4)거래 및 결제 기술의 완전 무결성을 위해 이상을 감지하는 기술 관련 솔루션 소개, 5)온오프라인 결제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상품 추천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털 쇼핑 서비스 등의 꼭지를 잡아서 두 번째 기획안을 냈다.

(2)다만 이들 사이에는 ‘빅데이터를 다룬다’는 사실 이외에 이렇다 할 공통점이 없었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 사람의 움직임을 기록한 데이터를 분석해 교통 및 맛집 추천 서비스는 물론, 매장 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솔루션에 관한 아이템을 따로 준비해갔다. O2O 분야의 비즈니스를 강화하려는 IT 기업이 오프라인 매장 정보를 지도에 맵핑하는 과정에서 지도와 관련된 다양한 움직임이 일었던 배경도 이런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6.두 번째 회의가 진행됐다. 4개의 부서가 취재한 내용을 다루기에는 주제가 지나치게 광범위했다. 지면 분량(10P)에서 다뤄야 할 내용도 지나치게 많아지는 듯했다. 교통 빅데이터, 내비게이션 빅데이터처럼 특정 분야의 빅데이터 분석 및 활용 트렌드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국장은 ‘재미없다’라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새롭게 정해진 주제는, 갑자기 ‘빅데이터와 헬스’였다. 애플이 애플 워치로 획득한 대규모 건강 데이터를 의학적 연구에 활용했다는 기사를 소개한 나더러 세 번째 기획안을 준비해보라는 지시가 있었다. 관련해서 산업적 움직임과 제도적 한계 등을 다루면 좋겠다 싶어서 이 내용을 담았다.


7.좀 더 ‘좁혀서 진행하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받았다. 때마침 유전체(게놈) 데이터를 분석해서 유방암을 일으킬 변이가 있다는 사실을 접한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 절제 시술을 받았다는 뉴스 덕분에 바이오·헬스 시장에서도 빅데이터 돌풍이 일었던 때였다. 이에 의료 빅데이터에 대한 소개와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던 유전체(게놈) 데이터에 관한 내용의 네 번째 기획안을 들고 세 번째 회의에 참석했다. 유전체 개념이 너무 어렵단다. 출입하는 기업체를 취재해서 매일 발제 기사를 내던 와중에, 잘 모르는 빅데이터 영역과 관련해 기사를 준비할 시간이 빠듯한 상황이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하루 8시간을 온전히 투자해 기획안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을 테니 기획안 완성도가 높지 않았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재미없다고 하고, 시키는 대로 준비해서 갔더니 어렵다고 하니 정말 이제는 어떻게 기획안을 준비해야 할지 퍽 난감했다. 일하지 말라는 건가, 내가 싫은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8.”이수경이 너는 빅데이터를 잘 알아야 한다”면서 포럼을 다녀오란다. 서울경제에서 진행하는 “4차 산업혁명과 빅데이터 - 한국의 현주소는”이라는 포럼에 다녀왔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색깔의 산업 혁명 전략을 펴야 한단다. 오프라인에서 수집한 정보를 클라우드에서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수급하기 위해서는 규제 완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전환됐다. 정부는 승자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단다. 정부 정책과 관련된 따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기획 기사와 엮어야 하나 난감했다. 윗분들이 좋아하는 거시적이면서도 원론적인,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번씩 했던 이야기(의료 빅데이터, 금융 빅데이터, 사용자 이동 데이터 등)를 모두 포괄하면서도 ‘개인정보 관련 규제를 완화할 노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하는 다섯 번째 기획안을 제출했다.


9.9월 마지막 월요일 빅데이터 관련해 네 번째 회의가 열렸다. “포럼을 너만 다녀왔냐~”면서 대화의 포문을 연 윗선은 다시 빅데이터 관련 기획안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왜 이렇게 자꾸만 기획안의 방향성이 바뀌는지, 그리고 갑자기 ‘신한카드 부사장’ 인터뷰 기사가 들어가야 하는지 봤더니, 8월에 처음 대표의 지시 자체가 ‘금융 산업에서의 빅데이터 활용’을 주제로 한 기사였단다. 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를 이제야 들어야만 했는지 자괴감이 들고 괴롭기만 했다. 결국에는 모든 부서에서 사람이 한 명씩 차출해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에서 꼭지를 하나씩 제공하기로 결론 났다. 이번에는 같은 부서 선배와 함께 여섯 번째 기획안을 작성했다. 그 사이 빅데이터 관련 정책 세미나에서 들은 내용으로 일곱 번째 기획안도 냈으나 “지나치게 학술적이며 구체적인 활용 사례가 없다”고 피드백을 줬다.


10.결국 다섯 번째 회의에서는 넷플릭스가 사용자 앱 이용 패턴을 분석해서 영화 ‘하우스 오브 카드’를 만들었다는 매우 고전적인 사례가 언급됐다. 빅데이터를 전술적으로 잘 활용해 성장 모멘텀을 확보한 기업 사례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진대연 님의 도움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스타트업을 정리한 8차 기획안을 가지고 여섯 번째 회의에 참석했다. 글로벌을 표방하고 있는 월간지에서는 해외 취재도 적극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업이 겨우 인지한 상황이었고, 11월호 마감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취재 계획서를 작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11.특히 미국에서는 회사와 일정과 취재 내용에 관해 상세하게 미리 협의하는 게 업무상 매너라고 들었다. 하지만 이를 미리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어떤 기업이 취재에 응해줄 수 있을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불확실성이 크다는 의견도 전달했으나 이는 묵살됐다. 되는대로 일단 연락해보고 빅데이터 기사 포맷에 맞게 취재 계획서를 내라고 했다. 거기에다 이런 말도 더 추가됐다. “주말에 기획안 곰곰이 생각해서 다시 내라. 추가로 연락할 수 있는 해되 기업도 찾아놔라”고 말이다. 그간 해외 취재에 관한 언급이 일언반구 없다가 마감이 한 달조차 안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미국 기업을 섭외해 취재해오라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등장한 편집장 미란다 식의 주문에 다소 기가 막혔다.


12.울며 겨자 먹기로 대연님의 도움으로 에버노트 CEO 인터뷰 장소와 시간, 주제를 확정한 취재 계획서와 우버 등에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내용의 열번 째 기획안을 냈다. 당일 오후 “해외 출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라고 기가 차고 코가 찰 노릇의 회신이 왔다. 마감까지 2주가 될 때까지 열두 개의 기획안을 수십 번 고쳐 쓰고, 일곱 번의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위에서 원하는 대로도 써보고 내가 해보고 싶었던 주제로도 해보고 나니, 이제야 이수경이 네가 쓰고 싶은 기사를 쓰란다. 결국 에버노트 사례는 서면 인터뷰로 대체하게 되면서, 담당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며 연신 죄송하다는 이야길 해야만 했다. 그렇게 8페이지 분량의 내 기사를 메인 기사로, 선배와 함께 써냈던 여섯 번째 기획안의 타부서 꼭지 기사를 합쳐 11월호를 마감했다.


13.이후에 회사를 나갈 즈음에 빅데이터 기사 관련 일화가 언급됐다. 국장은 ‘너’ 잘못이라고 말했고, 이 상황을 함께 지켜보던 부장은 빅데이터를 잘 모르는 사람이 모여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했던 상황적 이유로 발생한 문제라고 위로를 해줬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내 잘못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역시 하나도 없었다. 부서마다 제각기 빅데이터 활용 주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융부-금융 기업, 산업부-기술 중심 기업, 국제부-전세계 모 기업, 유통부-유통 기업에서 빅데이터로 어떤 혁신을 일궜는지, 어떻게 혁신을 일궜는지를 다루고 싶었을 테다. 이걸 하나로 엮어서 기사를 낸다고 할 때, 부장 선에서 이미 합의가 다 끝났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열두 개의 기사 모두 주제와 방향성이 모두 제각기 달랐다. 결국에는 본인도 만족할 수 없는 글이 나와버렸다.


14.이런 일련의 경험 때문인지 업무 지시의 방향성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주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로 인해 내게 얼마다 변덕스러운 지시가 올지,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허비하다 결국 본인 스스로 납득하지 못할 결과물이 결과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치 않는 방향이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거라면 구시렁대기는 해도 따를 거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다르고, 심지어 오전과 오후의 지시 내용이 다르다면, 그것도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말이 다르다면 정말 너무 힘들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으로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완전 땡큐 베리 마치 감사다. 회사와 나의 비전과 가치가 완전하게 일치했을 때는 정말 훌륭한 업무 성과가 난다.


15.회사 일로 한창 재미를 느끼던 시기에 github pages로 나만의 블로그를 준비하고, 아웃스탠딩에 기고할 때 참고할 글쓰기 플로우를 정제하는 일을 소홀하게 대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다시 회사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마음을 다잡을 수단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 생활에서 느끼는 불만족을 사이드 프로젝트 실행의 원동력으로 삼았더니 또 회사 생활에서 다시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회사 일에서 재미라도 느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이드 프로젝트가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줬다. 안타깝게도 회사 생활은 전자의 상황과 후자의 상황이 일련적으로 반복되는 곳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야만 한다.



Samantha
Samantha 7년차 글쟁이. 경제지와 뉴미디어에서 기자로 일하다, 현재 IT 기업에서 인공지능 콘텐츠를 쓰고 있다. 취미로 생산성 앱을 활용한 글쓰기 프로세스를 연구한다.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