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에 대한 긴 고민

0.결혼예정일까지 6개월하고 2주일이 남았다. 7월 말 퇴사 후, 8월 한 달간은 신혼집 이사-이삿짐 정리-예식장 계약으로 바쁘게 보냈다. 9월에는 웨딩링 예약-신혼집 정리-치아교정으로 역시 바쁘게 보냈다. 10월 들어서면서부터 슬슬 구직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는데, 문득 ‘운영’ 업무를 맡으면서 느꼈던 큰 두려움이 다시금 떠올랐다.


1.집안 살림을 잘 정리하는 노하우를 얻고자 유튜브 콘텐츠를 하나씩 섭렵하던 중, 한 크리에이터가 “주방을 주기적으로 정리하는 일만큼 중요한 건 (깨끗한 상태가) ‘유지’되는 정리 법칙을 정비하는 일”이라고 한 말이 크게 와닿았다. 날 잡고 정리를 해도 정리 법칙을 세우지 않으면 조만간 다시 어질러진다고도 덧붙였다. 이를 보고 어떤 물건을 어디에 넣어둬야 하는지 나름의 규칙을 만들고, 이 규칙에 의거에 물건을 정리했다. 찌든 때를 빼고, 가전과 가구를 재배치하고, 집안 살림을 재정리하고, 인테리어 아이템을 새로 들인 지 2개월이 지나니, 집다운 태가 났다.


2.특히 과탄산소다를 탄 뜨거운 물에 한 시간가량 불린 스테인리스 제품이 빤딱빤딱하게 변했을 때 기분이 정말 째졌다. 아침 늦게까지 자다가 느긋하게 일어나자마자 집에서 키우는 모든 식물을 들여다보는 일도 재미났다. 햇빛이 집안 깊숙하게 들어오는 늦은 오후에 뚱땅뚱땅 피아노 치는 맛도 보았다. 서랍과 펜트리에 차곡차곡 쌓아 넣은 짐을 보면서도 뿌듯함을 느꼈다. 나만의 정리 체계대로 매일 새로워지고, 깨끗해지는 집을 보면서 한때는 ‘이대로 전업주부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


3.지루함을 느낀 건 그 이후부터였다. 완비된 정리 법칙에 따라 집안 살림을 해나가는 ‘운영’ 모드로 돌아서면서부터다. 청소-빨래통 비우기-빨래 개기-설거지-재활용 분리배출이 점차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집을 꾸미는 재미에 빠져서 깜빡한, 전업주부가 매일 해치워야 하는 ‘집안일’이 그제야 떠올랐다. ‘살림한다’를 ‘집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다 또는 더러워진 부분을 제거하다’라고 정의해본다면, 특별한 기법이랄 것 없이 부지런을 떤다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반드시 ‘나’라서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전업으로 해야 할 만큼 살림 규모가 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아직은 글쓰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회사를 찾아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4.앞서 말한 결론은 회사에서 기술 세미나 운영을 해보면서 내린 바와 비슷했다. 직접 경험해보면서 얻은 노하우는 내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수십 시간을 걸쳐서 만든 진행 가이드만 있다면 이 업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이어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정도 연차 정도에서 각자의 역할 안에서 해본 ‘운영’ 업무 경험만으로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이처럼 숙달만 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법한 일은 냉엄한 생존 시장에서 별다른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아서, 엄습해온 불안감에 심란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5.이미 두 번의 연말 파티를 기획해보면서 얻은 경험을 업무에 그대로 녹여내 세미나 운영 프로세스를 만들었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초청하는 일인 만큼 확정된 정보는 한꺼번에 전달하고, 여러 차례 걸쳐서 반복해서 안내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개발자와 여러 해에 걸쳐 커뮤니케이션하면서 키워낸 ‘친절한’ 대화법으로 교수님들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직접 일을 해가면서 운영 프로세스를 개선해나갔다. 아쉽게도 이 과정에서는 새로운 기사나 책, 영상을 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새로운 자극이 없는 만큼 스스로 발전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6.운영 업무의 비중은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 않을 상황이었다. 글쓰기 비중은 점점 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커지지 않을 상황이었다. 나의 자존감을 유지하고, 회복하고, 올리려면 글쓰는 일을 메인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어섰다. 지금까지 7년간 유지해온 ‘글쟁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기가 싫었다. 글을 쓰지 말라는 건 내 존재 이유와 행복의 원천을 없애라는 말과도 같았다. 어떤 일에서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10년은 해야 한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나머지 3년을 뜻깊게 보내서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 생겼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한 달여간의 고민 끝에 잘 다니던 회사를 나오게 됐다.


7.이제는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크다.

-1.지난 4년간 AI 라이터로 일한 덕분에 수많은 연구원과 엔지니어와 함께 일하며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다. “음성, 자연어처리, 컴퓨터비전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얕게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며 좋게 평가해준 이들도 몇 있었다. ‘최초’라서 많은 어려움은 있겠으나, ‘최초’라서 오는 이점도 크다는 의견을 주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로써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문이다. 국내, 아니 전세계를 통틀어 외부에 게재된 ‘AI 라이터’ 채용 공고는 0에 수렴했다. 페이스북 미국 본사의 AI 라이터 채용 공고가 전부였다. 앞으로도 AI 라이터로 살아간다면 직업 영위 자체가 어려워질 수가 있다.

-2.좀 더 넓게 나아가서 Tech 라이터로 일하는 방법도 있다. 내로라하는 AI 전문가와 협업해 글을 썼던 것처럼, 서버, 클라우드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서 글을 써나간다면 시야는 분명 트일 거다. 지금까지 쌓아온 엔지니어 인맥을 살릴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다만 “이렇게까지 쉽게 쓰도록 노력해야 할 분야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AI 연구를 소개하는 글을 쓸 때도 숱하게 듣는 말이었다. 어차피 연구하는 사람들은 논문을 보지, 한글 콘텐츠를 안 읽는단다. 엔지니어가 원하는 수준의 깊이가 있는 글을 쓸 자신이 내게는 사실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일부 동의하고, 일부 동의하지 않는다. 연구실 밖에 존재하는 비 기술자인 내게는 활용처가 없는 기술을 다룰 능력이 없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실제 서비스와 제품에 적용된 기술이라면 조금은 다른 글을 쓸 수 있다는 거다. 작동 원리보다도 해결하려는 문제와 해결 방법, 그렇게 구현하는 이유와 해결 방법에 좀 더 초점을 맞추면 된다.

-3.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방향성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그건 성공적인 개발/연구 프로젝트가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거다. 아울러 독자로부터 찬사를 듣는 엔지니어와 연구원 뒤에 서 있어야 한다. 내 기여와 노력은 사실 같이 공동 집필하고 감수를 해준 이들만 겨우 알아주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성과가 나오지 않은 1년 동안 자체적으로 기획해서 쓴 글이 몇 편 있는데, 서툴지만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한 자씩 고민해서 쓴 그 글에 대한 애정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런 걸 미루어 봤을 때, 기획력이 돋보이는 글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난다.


8.지난 7년간 5곳의 회사(법인)에서 일했다. 단순 평균 산술을 내면 한 법인당 약 1년 5개월을 다닌 셈이다(카카오브레인-카카오엔터프라이즈는 부서 이동의 개념이라서, 통틀어서 4년으로 셈하고 있다). 잦은 이직의 이유는 정말 단순했다. 물로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여러 부차적인 이유도 사실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직접 현장 나가서 취재해서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IT 회사의 기술력을 부각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AI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아닌 기술자를 만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그걸 할 수 있는 회사를 선택해왔다. 3명, 25명, 45명, 100명, 1000명이라는 여러 규모의 회사에서 생기는 여러 장단점을 짧은 시간에 경험한 덕분에 이제는 어떤 환경에서 내가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 감도 잡았다. 짧게 쓰려던 글을 3,900자 가까이 쓴 거 보면 진짜 이제는 일할 때가 가까워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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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ntha
Samantha 7년차 글쟁이. 경제지와 뉴미디어에서 기자로 일하다, 현재 IT 기업에서 인공지능 콘텐츠를 쓰고 있다. 취미로 생산성 앱을 활용한 글쓰기 프로세스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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