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깊이와 너비

0.햇수로 6년째 알고 지내는 물류 전문 콘텐츠 크리에이터인 친구를 만나서 간만에 수다를 떨고 왔다. 접점이 없던 이 친구와 빠르게 친해진 건 ‘동갑’이라서도 있지만, 자기 전공에 대한 곤조가 남다름에 관한 공통점이 있어서였다.


1.이 친구는 물류학을 전공해 물류 산업을 취재했고, 나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해 IT 산업을 취재했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2016년 그 당시에는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기사를 쓰는 타이틀은 의학전문기자, 법률전문기자, 국제전문기자 정도였다. 그래서 이들을 채용하려고 낸 공고에는 관련 전공자나 실무자를 우대한다는 내용이 필히 쓰여 있었다. 하지만 IT 취재 영역에서는 개발자가 아닌 기자가 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실제로도 이는 우대 요건이 아니었다. “내가 이해한 정보 기술을 남들에게 쉽게 전달해보자”라는 미션을 수행하고자 기자가 되었던 나는, 자신의 전공 지식을 가지고 “물류 산업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파헤쳐보자”는 걸 해보려는 이 친구와 필연적으로 친해질 수밖에 없음을 첫 만남에서 깨달았던 듯하다.


2.이런 내 확고한 신념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예비 가맹점주를 상대로 진행하는 사업설명회에 잠입 취재를 하다가 걸려서 겸연쩍은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좋았다. 취재원이 나를 믿고 준 근로계약서를 함께 분석해줄 만한 노무사를 찾아 헤매도 괜찮았다. 매체 이름을 낯설어하는 정부 부처에 전화를 돌려 가면서 스타트업 규제에 관한 담당 사무관의 멘트를 따는 고생도 다 좋았다. 살아 숨 쉬는 기사를 쓸 수 있다면 말이다. 최대한 자세히 알고 싶었다. 홍보 관계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홍보팀 보라고 쓰는 기사 말고, 현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보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분야에서 전문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믿었다. 깊이 있는 콘텐츠에 관한 열망은 이토록 강했지만, 2년마다 출입처를 바꿔가면서 매일 새로운 취재 기사를 써내야 하는 언론 시스템 안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덕질’이 우수한 콘텐츠를 쓰는 데 최고라고 여기던 아웃스탠딩으로의 이직은 이런 배경이 놓여 있었다.


3.어떤 선배가 사석에서 “이수경, 걘 안돼”라고 했다는 말이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선배 말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나는 아웃스탠딩에서 무조건 잘 해내야만 했다. 그게 내가 기사를 열심히 써야 하는 이유의 전부였다. 새벽 2시, 3시까지 써도 마무리를 하지 못하면 사무실에서 쪽잠을 잤다. 다시 일어나서 기사를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거나, 또는 집에 가서 잠깐 눈붙이고 일어나 기사를 마무리하고 출근했다.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콘텐츠를 주 3회 출고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아웃스탠딩이라는 브랜딩 파워의 뒷받침이 있었던 덕분인지 다행히 나쁘지 않은 성과를 냈던 것 같다. 회사의 지원 덕분에 한국IDG에서 기반을 닦았던 ‘생산성’에 전문화된 글을 연재하고, 관련 행사도 성공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4.하지만 예전 글(매너리즘을 타파하려는 용기)에서 쓴 바대로, 내가 아무리 혼자 책이나 보고서를 보며 알려고 노력해도, 관련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해서 파보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실체’에 근접하는 데에는 여전한 한계가 있었다. 몸소 체험해가며 나만의 방법론을 정립하는 생산성 도메인 외에서는 얕은 전달자에 머문다는 느낌을 여전히 지울 수 없었다. 콘텐츠 시장에서 내 몸값을 올리는 데 핵심이라고 본 인공지능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점차 현타가 몰려왔다. 그러던 와중에 카카오브레인으로부터 AI 라이터 포지션이 열렸다며 지원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AI 본진에 들어서야 딥러닝의 실체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섰다. 내 전공을 살려 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있었다. 그렇게 이직을 해서 4년 간 AI 콘텐츠를 만들었다. 외부에 공개해도 되는 내용만을 보는 글쓰기와 외부에는 절대 공개하면 안 되는 내용까지 보는 글쓰기와 하늘과 땅 차이였다. (RD 리더의 감수를 제외하면) 어떤 걸 쓰고 말지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체성을 느꼈다. 인하우스로 들어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원하는 바대로 업계 사람이 보는 글쓰기도 카카오에서 실현할 수 있었다.


5.AI 라이터의 가장 큰 과제는 회사에서 만들어낸 연구 성과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쓰는 글로 인해 당장의 내 평판은 차치하고서라도, 같이 글을 쓴 연구원에게도 해가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글 하나 쓰는 데 절반 가까운 시간을 연구 내용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 썼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이런 노력은 AI 분야의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몸부림하는 거리가 멀었던 거 같다. 그보다는 기자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사실관계 파악과 정확한 글쓰기, 텍스트의 효율적 배치를 고민하기 바빴다. 이제서야 예전에 “5년이고 10년이고 두루두루 돌아보고 나서 자기 전문분야를 정해도 늦지 않다”며 데스크가 내게 했던 말이 이해됐다. 데스크는 전문 지식을 습득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기본기를 다지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거 같다. 특정 사안을 여러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분석력이 있어야 가능한 ‘깊이가 있는’ 글쓰기를, 이제 겨우 1-2년 차 애송이가 하겠다니 얼마나 기가 찼을까. AI 연구나 개발, 하다못해 프로덕트 기획을 직접 해보는 게 아닌 한 관련 도메인 지식도 그저 글쓰기 소재일 뿐이라는 걸 경험해보니 이 생각에 확신이 선다.


6.실제로도 나는 오늘 친구와 완성도 높은 글쓰기 자체의 어려움을 주로 토로했던 거 같다. 반면, 친구는 본인이 대학교에서 배운 이론, 관련 업계 기사를 모니터링하면서 캐치업해온 업계 동향, 업계 사람을 취재하면서 얻은 현장 지식, 그리고 본인이 직접 네이버 스토어도 운영해보고, 물류 창고에서 알바도 해보는 경험으로 얻은 깊이 있는 통찰력을 내게 공유해줬다. 나는 이 친구와 내가 참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오늘 이 지점에서 굉장히 다른 지향점을 두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콘텐츠 창작자, 스토리텔러라는 여전한 공통점이 있다.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은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도 필히 갖춰야 한다는 자기 소신을 덧붙이기도 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제야 내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좀 더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7.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온 대로 연구개발 성과’만’을 쓰는 건 개인적 발전에 분명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그렇기에 AI 라이터니, 테크 라이터니 하는 타이틀을 떼는 선택마저 해야 할 거다. 이런 결론이라면, 지난번 쓴 글(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에 대한 긴 고민)에서 제시한 1번과 2번 옵션은 제거해야 마땅하다. 앞으로 개인의 커리어 완성을 위해서라면, 매체에서의 글쓰기처럼 법률, 산업, 기술, 경제, 사회, 윤리 면에서 한 사건을 다각적으로 분석해서 쓰는 글을 더 많이 쓸 필요가 있겠다. 지난 4년간은 4번의 내용대로 정말 철저한 팩트 체크와 취재한 내용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훈련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문 하나를 쓰려고 일 년 반가량 수도 없이 가설을 세우고 이를 실험한 연구원들처럼, 이제는 그런 경험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5시간 넘도록 이 글을 고쳐서 쓰는 거 보면 분명히 가치 판단적 내용을 담는 글쓰기 역량을 더 다듬을 필요가 있겠다 싶다.


Feature image by AlexanderStein from Pixabay



Samantha
Samantha 7년차 글쟁이. 경제지와 뉴미디어에서 기자로 일하다, 현재 IT 기업에서 인공지능 콘텐츠를 쓰고 있다. 취미로 생산성 앱을 활용한 글쓰기 프로세스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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