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목표로 삼지 않은 선택이 야기한 우울함
0.지금까지는 줄곧 어떤 형태의 글을 쓸지를 두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는 이야기를 반복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빠진 솔직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때는 2021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이뤄지면서 내가 몸담던 팀은 더는 AI Lab 소속이 아니게 됐다. 이는 AI Lab을 위해서만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했다. 당시 나의 선택은 “내가 속한 조직을 위한 일을 하자”였다. 조직장이 나아가려는 길을 지지했고, 거기에 공감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우여곡절이 많았어도 어렵사리 쌓아온 신뢰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지지를 받고, 또 반대로 지지해온 그 관계를 믿고 일단 따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 이 회사에 들어온 이유였던 AI 연구 및 개발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글쓰기로 계속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2.리더는 내가 AI Lab 연구원 및 엔지니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부분을 눈여겨봤다. 그래서 그런 장점을 십분 살려볼 수 있는 여러 프로젝트를 해보라며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해주기도 했다. 나름대로 재미있게 진행도 해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바로 기술 세미나였는데, 정말 아주 중요한 의사결정만 제외하고는 모든 기획과 운영과 관련된 모든 부분을 살뜰하게 챙겼다. 카카오 모든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규모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는데, 더 많은 사람이 보고 듣는 규모로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도 대단히, 그리고 매우 큰 만족을 느꼈다. 회사에서 더는 글을 쓰지 않더라도 나의 쓰임이 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내게 큰 기쁨과 위안이 됐다. 리더는 이런 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며 밖으로 그 외연을 확장하는 데에도 많은 자극을 줬다.
3.그렇게 해서 2021년 6월 처음 Developer Relations라는 일을 해보는 부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테크 커뮤니케이터가 필요한 이유’나 ‘IT 회사에는 글만 쓸 줄 아는 사람이 설 자리가 없다’라는 글을 쓴 시점과도 맞물린다. 내가 쓰는 글은 사실상 기술직군의 채용과 기술 커뮤니티를 상대로 하는 브랜딩을 목적으로 했다. 글만으로는 이런 채용과 브랜딩을 달성하는 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다양한 행사를 여는 등 기술 커뮤니티 사이로 한 발자국 나아갈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때다.
(1).하지만 시작은 가벼웠어도 진지했던 고민과는 다르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많은 주저함이 있었다. 카카오브레인 시절의 어려움이 떠올랐다. 아무도 내게 어떤 걸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내 역할을 정의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에게는 그런 용기도, 경험도 없었다. 그 사이에 내적으로 방황을 많이 했다. 사수가 있어 내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조언해주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주변에는 비슷한 경험을 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서 혼자 4년에 가까운 시간을 고군분투하며 나름대로 기술 회사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가닥을 잡아가는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전은 무모하게 느껴졌다. 내부에서 누군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결국 또 하나씩 부딪혀가면서 홀로 헤쳐나갈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2)만약에 한다고 해도, 내부 구성원을 상대로 “내가 developer relations를 하는 사람이다”라는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부분에서도 많은 난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의 테크 브랜딩은 물론, 테크 직군 리쿠르팅과도 겹치는 영역의 일이라서 역할과 책임을 분배하는 데만도 영겁의 시간이 걸릴 일이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외부 Developer Relations 업무가 잘 정착된 조직을 찾아 나서는 부분도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이직’을 생각해본 건 바로 이 시점이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관련 공고를 추천받아서 입사 지원을 해볼까만 고민한 회사도 있고, 실제로 입사를 지원해서 최종 합격까지 갔다가 고사한 자리도 있다. 그만큼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4.하지만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련의 기술 세미나가 끝난 시점 이후였다. 내 안의 무언가가 갑자기 사그라든 느낌이었다. 더는 열심히 하고 싶은 게 없어졌다. 심지어 리더와의 1:1 미팅에서도 “요즘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했으니 말 다 했다. 당시에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글쓰기에 대한 내 열망 또는 욕망이었다. developer relations는 순전 이 회사에 남기 위한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지, 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
(1)실제로 2020년 10월에 이미 ‘쓰기’를 결정해 내 리소스가 상당히 들어간 글 2편만 2021년에 퍼블리싱됐다. 그 이외의 글은 새롭게 기획하지도, 제작하지도 않았다. 당분간 내가 속한 조직을 위한 일을 하기로, 그래서 글을 쓰지 않기도 결정한 건 순전 내 결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글쓰기 없이도 조직 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큰 상실감을 느꼈다. 내가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감이 갑자기 일시에 몰려왔다.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바닥으로 내려앉는 내 감정을 나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2)그러다가 한 지인이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처방받아 초기 우울증 증상을 경감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 건물 2층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예약했다. 그게 내가 내 몸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내 이야기를 찬찬히 듣던 선생님은 일단 휴식을 취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보길 권고했다. 앞으로 한평생을 같이할 동반자와의 가정생활을 위해서라도 일과 직장보다는 나와 가족을 위하는 선택을 하길 바란다는 말도 함께 말이다. 그날로 나는 주말을 포함해 5일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나 또한 세로토닌 흡수를 억제하는 약물 처방을 함께 받았는데, 실로 큰 도움이 됐다. 나락으로 빠지는 나를 누군가가 낚아채서 강제로 따사로운 햇볕이 가득한 정원으로 초대한 듯이 매우 평온한 마음 상태에 다다랐다. 갑자기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의욕이 들었다.
(3)그래서 휴식 기간에 성격기질검사(TCI)를 받았다. 검사에서 말하는 ‘기질’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선천적인 측면을 의미하고, 성격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또는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후천적인 측면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는 이 결과지를 받고 현재 내가 느끼는 좌절감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아는 나와 현재의 나 사이 큰 간극이 생겨버린 거다. ‘매너리즘을 타파하려는 용기’에서 설명한 대로, 지금까지 줄곧 글쓰기로 성취감을 느꼈던 나는 글쓰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글을 써야 살 수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이를 외면했다.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글을 쓰지 않음으로써 더는 살아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초현실주의작가 앙드레 브르통은 이렇게 말했다. “욕망은 세상에서 유일한 동기부여적 원리이며, 인간이 인정해야 할 유일한 주인이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유일한 동기를 잃었던 거다.
5.오랫동안 망설였다.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 나를 탓했다. 내 커리어를 지키겠다는 욕심을 조금만 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을 반하는 성격을 만드는 환경에 계속 나를 두고 있을 순 없겠다 싶었다. 원래 알던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디고 싶었다. 휴가를 마치자마자 돌아가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다른 부서로의 이동도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나름대로 충분히 노력했기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 내가 할 일은 더는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퇴사를 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은 본인 스스로 답을 찾아낸 사람에게 더는 약 처방이 필요 없을 거 같다며 상담을 종료시켰다.
6.거취를 정하지 않은 퇴사에 여러 우려가 뒤따라왔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입사 (지원) 제안을 받았다. 글을 써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회사가 많다는 게 내게는 정말 큰 위로가 됐다. 오랫동안 다뤄온, 그래서 많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AI와 기술 사회를 떠나는 결정에 물론 지금도 미련이 넘치고도 넘친다. 하지만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에 대한 긴 고민’에서 쓴 대로,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성공에 기대지 않고 내 기획력과 추진력에 기대서 글을 쓸 수 있는 곳에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거라는 판단, 확신이 섰다. 인공지능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주제의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바로 이 계산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글이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라면 커뮤니케이션 업무 자체를 해보는 일도 커리어 발전에 큰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7.그렇게 나는 내가 글을 써주길 바라는 회사로 왔다. 본래의 나를 되찾아 일을 할 수 있어서 업무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 내 목표와 인생 동기를 되찾은 덕분에 행복마저 느낀다. 그래, 이거면 됐다.